'석곡 하얀찔레꽃'에 보내드린 석곡의 인물 소개 글입니다.
석곡이라는 인물을 먼저 소개해 주세요.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은 1855년 11월 10일 지금의 동해면 임곡리에서 출생하여 유년기에 석동(石洞)으로 이주 후 일생을 그 곳에서 지내다 1923년 10월 10일 향년 6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석곡’이라는 그의 호는 유년기부터 ‘석동’에 지낸 것을 계기로 스스로 ‘석곡(石谷)이라 하였다.
석곡은 어려서부터 가정이 극빈함에 땔나무를 하고 농사일을 돕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명하고 영특한 두뇌로 유학경전과 제자백가를 독학으로 섭렵하였다. 또한 견문을 넓히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 토론을 벌였으나 품은 의문을 풀 수가 없어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이치를 스승으로 삼고, 성인의 글인 사서오경을 위주로 공부해 마침내 40세에 깨달음을 얻게 됐다. 나중에 석곡서당을 열어 많은 제자를 길러낸다. 그는 심학(心學), 주역(周易), 천문학(天文學), 수학(數學) 및 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파고들어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선생의 비문(碑文) ‘나는 마음이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에 유(遊)하고 행(行)은 공자(孔子)를 수(守)하고자 한다.’에 나타난 것처럼 동양학의 원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송유(宋儒)의 육경주소(六經注疏)를 산삭(刪削)함에 무능한 권위주의 선비들로부터 비난과 조소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 시대에 이론적, 학리적으로 석곡의 육경주소 산삭을 부당하다고 논쟁한 학자는 없었다.
석곡의 유학에 대한 깊은 조예는 의학이론과 임상치료 연구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한의학의 경전 ‘황제내경(黃帝內經)’과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보완, 연마하여 저술한 ‘소문대요(素問大要)’, ‘의감중마(醫鑑重磨)’는 그의 학문적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석곡이 책을 제작하기 위해 직접 만든 목판 600여장 중 364장은 2009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관 중에 있다. 그리고 석곡의 주요저서 ‘석곡산고’, ‘석곡심서’, ‘포상기문’ ‘의감중마’ 등은 2010년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국역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포항시에서도 석곡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9년 3월 그의 고향 동해면에 석곡도서관을 개관하여 운영 중이며, 또한 '2014 포항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었으며, 석곡을 주제로 한 다양한 학술대회와 심포지엄 등이 개최되었다.
석곡 이규준은 황도연, 이제마와 함께 조선말 한국의 한의학을 빛낸 삼대(三大) 의가(醫家)로 손꼽히고 있으며, 유학 쪽에서도 그 업적이 꾸준히 연구 조명 되어지고 있다.
석곡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포항에 알려지게 되었죠?
석곡의 말년(末年) 제자인 무위당 이원세 선생에게 배움을 청하던 한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1990년 ‘석곡학회(石谷學會)’를 창립하였다. 이듬해 학회이름을 ‘소문학회(素問學會)’로 바꾸며 석곡 사후(死後) 68년 만에 동해면 화주산에 있는 석곡의 묘소를 참배하게 된다. 이후 매년 10월 말경에 이어져 오던 참배행사에 2003년 향토사학자이신 황인 선생님이 참가하게 되면서 서서히 동해면을 중심으로 포항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석곡이 한의학에 국한된 인물인가요?
석곡의 마지막 제자인 무위당 이원세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무위당의 제자들이 처음 학회를 조직하면서 ‘석곡학회’로 이름을 지었을 때, 무위당은 ‘석곡(石谷)’ 대신 ‘소문(素問)’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당시 학회를 조직하려는 이들이 대부분 한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석곡의 큰 학문 가운데 고작 ‘의학’에만 한정된 식견을 갖고 실천할 뿐이니, 석곡의 큰 이름에 부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석곡의 서책은 육경(六經)<모시(毛詩), 상서(尙書), 주역(周易), 춘추(春秋), 주례(周禮), 의례(儀禮)> 26책(冊), 경수삼편(經髓三篇)<대학(大學), 중용(中庸), 예운(禮運)> 1책(冊), 전례(典禮) 1책(冊), 논어(論語) 3책(冊), 효경(孝經) 1책(冊), 당송고시(唐宋古詩) 1책(冊), 후천자(後千字) 1책(冊) 등과 서양의 역사와 문물에 대해 논한 포상기문(浦上奇聞) 1책(冊), 조선 성리학과 당파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자신의 철학사상을 피력한 석곡심서(石谷心書) 1책(冊), 수학에 관한 구장요결(九章要訣) 1책(冊), 그외에도 신교술세문(神敎術世文) 1책(冊), 석곡산고(石谷散稿) 2책(冊) 등이 세상에 전하여지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석곡의 학문적 범위는 매우 넓고 깊었으며, 그의 학문은 의학을 뛰어 넘어 근대 지성사의 중요한 위치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곡이 포항이라는 산업도시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죠?
포항 시내에서 포스코 대교를 넘어 서게 되면 대한민국 근대화 산업화의 주역인 자랑스런 제철공단을 지나가게 된다. 이 공단에서 생산하였던 수많은 철강관련 생산품들은 대한민국을 일으키고 튼튼히 지지하였으며 또한 포항지역 경제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 공단을 지나 동해면에 들어서게 되면 석곡의 이름을 딴 석곡도서관이 나타난다. 공간적 시간적 배치가 오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즈음에 마주치게 되는 석곡이라는 인물이 포항시민들의 정신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안성맞춤인 것이다.
석곡의 학문중 중요한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세요.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니 근본이 든든해야 국가가 평안하다. 하늘이 백성을 낸 후에 군주도 만들고 스승도 만들었다’고 보아 민본주의를 중시하고 전제정치를 배척하였다. 이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피폐된 백성의 삶과 낙후된 정치를 개선시켜 선진문명발달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허례허식과 계급의식에 찌들어 있는 사회 의식을 타파하여 백성의 주린 배를 해결하기 위해 실학사상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석곡은 마음(心)을 중심으로 인간의 생명과 질병을 치유하고 나아가 사회 개혁에까지 일관된 관점을 추구하였다. 기존의 관념에서 이원론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바라보던 성정(性情)과 심(心)을 심성일물(心性一物) 이기합체(理氣合體)라 하여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통합하여 작게는 스스로의 마음 수양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넓게는 의학, 정치, 사회과학에까지 연결될 수 있는 영역으로 폭넓게 확장시켰다.
석곡의 학문이 현재에도 미래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요?
석곡의 학문은 의학에서 지금도 소문학회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의료현장에서도 그의 심학(心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의학 뿐만 아니라 타분야에서도 다양한 연구가 축적되면 향후 포항의 향토사적 주요인물을 넘어서 한국문화의 선지자적 인물로 자리 매김하게 될 것이다.
글쓴이: 김학동 (한의학박사/동국대한의대 외래교수/김학동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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